모든 미디어 보기
단편 소설

횃불의 공포

PDF 뷰어텍스트 뷰어PDF 다운로드

/

좋아. . . 연습한 대로만 하자. 심호흡하고, 발뒤꿈치를 톡톡 튕겨 행운을 부르는거야.

“이야, 좋은 오후입니다. 비할 데 없이 존귀하신 첩보단장 나리!” 플린 페어윈드 선장이 요란하게 마티아스 쇼의 책상에 다가가 외투가 펄럭이도록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고 별일이 다 있네요.”

“여기가 제 일터입니다.” 쇼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음색만 듣고는 대답이 설명조인지, 질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렇겠죠! 질리도록 많이 하시던데요. 그러니까 일 말입니다.” 플린이 세련됐으면서도 실용적인 목제 책상 모서리에 양손을 올렸다. 그의 동작에는 쇼가 요새처럼 쌓아 올린 양피지 두루마리를 찍어 누르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리본으로 묶인 두루마리에는 저마다 스톰윈드 왕국의 인장인 사자 머리가 푸른색 밀랍으로 찍혀져 있었다.

             “실은 말이죠.” 플린이 곱게 접은 노란색 지도를 장갑을 낀 쇼의 손에 찔러넣었다. “일터에서 구출하러 왔어요.”

            “지도로군요.” 쇼가 말했다. 그의 초록빛 시선이 서서히 플린의 시선과 맞춰졌다.

            “번득이는 추론 능력인데요?”

            “그늘숲 것이고.”

            “어쩜 좋아, 머리도 좋네.”

            “어디서 난 겁니까?”

            “카드 게임에서 땄죠.”

            “그런데 왜 이걸 저에게?”

플린이 지도에 표시된 큼지막한 X 표시를 톡톡 두드렸다. “당연히 보물을 찾기 위해서죠! 엄청 똑똑한 양반치고 둔하기는.”

            쇼가 산더미처럼 쌓인 두루마리를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빼지 말고요.” 플린이 쇼의 팔에 손을 얹으며 재촉했다. “잔달라에서 돌아온 이후로 잠시라도 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한번 상상해 봐요, 친구! 보기 드물게 잘생긴 사람하고 같이 멋쟁이 모험가 2인조가 되어 산뜻한 공기를 마시고, 날 데려갑쇼 반짝이는 보물을 노리는 . . .”

            “그늘숲 공기를 산뜻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게다가 보물을 챙기면 어둠의 순찰대에서 말이 나올 겁니다.”

            “아, 댁이 그 양반들하고 아는 사이잖아요. 거창한 보물 사냥도 아닌데 잘 지지고 볶아서 허가받으면 그만이죠. 그리고 . . .” 플린이 쇼의 책상을 보곤 고개를 까딱였다. “시찰 차원에서 다녀와도 괜찮잖아요. 무언가 . . . 첩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쇼의 시선이 다시 책상과 두루마리로 향했다. “그늘숲을 뛰어다니면서 오래된 술잔이나 변색한 은 식기를 찾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죠?”

재밌잖아요, 이 사람아. 그쪽은 요즘 느껴본 적도 없는 거 말입니다. 전 여기 머무르면서 . . . 외교 등에 대해 배웠어요.” 플린이 지도를 휙 털어 보였다. “이건 제가 몸담은 세계이고 . . . 당신과 함께해보고 싶어요.”

쇼가 허름한 지도를 다시 바라보았다. “당신네 뱃사람들은 유령부터 시작해서 온갖 미신을 다 믿더군요. 그늘숲에는 아제로스에서 가장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는 데다, 마냥 평화로운 영면에 든 고인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험할 소지가 크죠.”

“그게 음, 우리 업계에 미신이 많긴 하죠. 솔직히 숨통 붙은 양반들을 곁에 두는 걸 개인적으로 선호하기도 하고. 하여간 다 제쳐놓고 당신이 지켜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지도를 걸었던 친구가 진짜라고 맹세까지 하더군요.”

플린이 세상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쇼를 상대할 때 인내심을 기르기로 약속했었고, 실제로 정말 노력하고 있었다. 첩자의 신뢰란 노련한 선장의 그것보다도 얻는 속도가 느리다는 걸 플린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쇼의 묵묵부답에 플린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플린은 즐거움의 만조를 타고 평화로운 항구에 입항한 한 척의 선박처럼 방에 들어왔다. 돛을 투지로 한껏 부풀린 상태였는데, 이제 와서 . . .

“아직 해야 할 업무가 태산인지라.” 쇼가 말했다.

플린의 마음이 깊고 깊은 심해로 빠져들었다. 마치 난파선처럼 . . .

그 순간 쇼가 플린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 . . 가서 보급품 챙기고, 해질 때까지 채비해두시길.” 그가 말했다. “저도 그때까지 일을 끝내놓겠습니다.”

#

“어째 좀 쌀쌀하지 않아요?” 빛바랜 보물 지도를 따라 그늘숲을 지나던 중 플린이 외투를 동여매며 말했다. 그야말로 우울함을 자극하는 장소였다. 하물며 지나쳐온 여관과 마을 광장도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군데군데 기둥에 걸린 여러 등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그마한 황색 불빛만이 가련하게 싸늘하고 음습한 어둠을 몰아낼 뿐이었다. “산뜻한” 공기와 관련해서는 쇼의 말대로였다. 모든 것에서 희미한 곰팡내가 났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달빛이 충만해 쇼가 지도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저주받을 그늘숲 같은 장소에서 오밤중에 지도를 읽는다든지 하는 건 쇼에게 이미 익숙한 행동이었으리라. 하여간 길을 따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낡은 주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때 무언가가 불빛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 안 자는 사람이 있군.” 플린이 말했다.

건물 안에서 음산한 신음이 들렸다.

쇼는 달리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 순간 웬 형체가 창문의 희미한 불빛을 가리는 게 아니겠는가. 플린의 눈에는 형체의 머리를 관통한 화살과 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언데드가 또 있었다.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가 의문에 잠겼다. 얼굴은 . . .

“젠장.” 플린이 웅얼거렸다. 그는 속도를 내어 쇼를 제쳤다. “곧 근사한 풍경이 나올 겁니다.”

“근사한 풍경?”

“고요의 정원 말이에요! 지금 꽃내음 한번 맡으면 세상 소원이 없겠거든요.”

“플린, 고요의 정원은 공동묘지입니다.”

플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쩐지. 돌이 비석처럼 생겼더라.” 그는 쇼의 손에서 지도를 낚아채 골똘히 응시했다. “저는 그냥 ‘고요의 정원’이라고만 나와 있길래, 정원이겠구나 했죠. 그것도 고요한.”

            “원래 이 일대 자체가 아름다운 곳이긴 했습니다. 밝은숲이라 불렸죠. 어둠골은 원래 너른마을이었고. 지금은 좀처럼 연상이 안 되지만요.”

            플린은 은근슬쩍 원기를 북돋는 럼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심신의 평화를 위해 배낭 내용물을 훑었다. 치유 물약, 마름쇠 , 약한 , 럼주, 붕대, 건빵, 럼주, 여벌 양말, 럼주 . . . 그러면서 쇼가 하는 말은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사람이 어찌나 철저한지 장소의 역사를 구구절절 읊조려댔다. 메디브가 어쩌고저쩌고, 낫이 어쩌고저쩌고 . . . 그렇게 두 사람은 순전히 배고픈 까마귀를 몰아내는 것 이상으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허수아비가 지키는 썩은 호박밭을 통과했다. 지도를 따라갈수록 플린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거미줄에 그대로 직행해 걸리기까지 했다.

            쇼가 플린의 밤색 머리칼에 묻은 길고 끈끈한 실을 뽑아냈다. “거의 다 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지도가 틀린 게 아니라는 전제하에.”

            “진짜가 확실하다니까요. 그 난리를 쳤는데 . . .”

            한껏 허세를 담아 내뱉던 플린의 말은 고통에 젖은 길고 낮은 울음소리에 그만 끊기고 말았다. 흡사 긴장한 이발사 수습생의 손에 들린 면도날처럼 소리가 습한 공기를 갈랐다. 필경 늑대가 낸 소음이리라. 아니, 늑대가 낸 소리이길 바랐다. 쇼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늑대가 달려들 것을 직감한 플린은 돌아서서 붉은 눈, 하얀 이빨, 검은 털가죽의 자취를 물색했다. 이미 떨 만큼 떤 플린 페어윈드에게 결의를 무너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늑대는 늑대고, 언데드 주민은 또 다른 얘기다. 그래도 이 정도면 플린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가 앞장서서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더니 쇼를 불렀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저만 믿으라고요! 보물도 분명 . . .”

            플린이 멈춰서서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쇼는 그 즉시 플린의 곁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플린은 젊은 여인 곁에 무릎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짙은 제복은 퍼져 나가는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부축하고 있어 봐요.” 플린이 쇼에게 말하곤 배낭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작은 약병을 개봉해 내용물을 여인의 목에 쏟아냈다. 반사적으로 삼킨 그녀는 잠시 회복되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 기운 없이 쇼의 가슴팍에 머리를 늘어뜨렸다.

“누군지 알아요?” 플린이 물었다.

            힘없이 늘어진 몸체를 양팔로 들어 올린 쇼의 낯빛은 침울했다. “사라 래디모어. 어둠의 순찰대 사령관입니다.”

계속 읽기

“쇼 . . . 어둠의 순찰대 사령관이면 지역 위협 정도는 거뜬히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입니다.” 쇼가 말했다. 다른 첨언을 하진 않았다.

“물약 덕분에 고비는 넘겼지만 회복된 건 아닙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성한 백발과 매서운 눈매를 가진 키 큰 노인이 자그마한 어둠의 순찰대 사무소의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 순찰대원 커트포드였다. “따라오십시오. 사령관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십니다.”

래디모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부상 치료를 위해 옷가지 일부를 잘라내야 했을뿐더러, 그나마 붕대로 뒤덮이지 않은 머리카락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플린이 사용한 물약은 쇼와의 보물 사냥을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산 상점 최고의 특제품이었다. 그런 물건을 마셨으니 사령관이 차도를 보여야 정상일 터였다.

            쇼가 병상으로 직행했다. “래디모어?”

            래디모어가 잠시 떨리는 눈을 떴다. “쇼, 쇼 님.” 그녀가 속삭였다. “서, 서. . . 성화 . . . 홰- 횃불이. . . 사라졌어요. 보고가 들어와서. . . 확인하러 갔는데. . . 제 채- 책임입니다. . .”

플린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횃불”이나 “성화” 같은 표현이 쓰일 정도면 그늘숲에서 사라져선 안 될 물건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어디 있었습니까?” 팔짱과 굳은 얼굴은 쇼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나타냈다. 심지어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 대단할 정도였다.

            “버려진 흉가에 있었습니다.” 사령관이 다시 혼절하자 순찰대원 중 하나가 대신 대답했다. “모벤트 펠을 퇴치하는 데 사용한 이후로 래디모어 사령관께서 공동묘지를 바라보게끔 그 개자식의 낡은 집 바로 앞에 횃불을 두셨습니다.”

            “모벤트 펠이란 작자가 누구죠?” 플린이 물었다.

            “강령술사 리치입니다.” 순찰대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말 감사하게도 영웅들께서 퇴치해 주셨습니다. 횃불은 빛으로 벼려낸 쇠로 만들어졌는데, 지난 몇 년 동안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암흑 마법을 무효화하고 언데드가 날뛰지 못하게 억제했죠.”

            “성화 횃불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무방비 상태인 그늘숲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겠군요.” 쇼가 이론을 내놓았다.

플린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망자를 옭아매는 방책이 사라졌으니 그늘숲을 마음껏 배회할 수 있을 터였다. 더군다나 횃불을 가로챈 자가 강력한 악인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파도만이 알지 않겠는가.

느닷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여러 어둠의 순찰대원들이 부상당한 동지들을 데리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오늘 밤 공격당한 순찰대원은 사령관뿐만이 아니었다.

“까마귀 언덕.” 한 부상자가 읊조렸다. “유령, 해골, 살아 움직이는 시체 모두 . . . 그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플린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망할 놈의 보물 같으니라고. 스톰윈드에서 맥주의 술독에 빠져 쇼라면 자기를 따르긴커녕 두루마리나 끄적일 거라고 청승을 떨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래디모어의 얼굴은 고통으로 뒤틀렸고, 비명 대신 숨이 막혀 구르륵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인의 입가에서는 피와 침이 뚝뚝 떨어졌다. 쇼가 순찰대원들과 상황을 논의하는 동안 플린은 습포를 꺼내 들었다. 사령관의 얼굴과 목은 피로 점철된 상태 그대로였다. 플린은 수년간 바다 생활을 하면서 병자와 부상자는 언제나 청결하게 닦아야 한다는 걸 체득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한 마음으로 사령관이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래디모어의 손을 닦아주고자 담요를 잡아당긴 순간,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의 손등부터 어깨에 이르기까지 팔 전체가 변색한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아직 터지지 않은 고름이 좀 있긴 했지만, 그밖에는 이미 파열되어 진물이 줄줄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플린에게 질병, 부상, 심지어 죽음도 그리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두려움을 촉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세 가지 비극이 거쳐 사람이 어떻게 될지가 플린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종기를 가르자 끔찍한 악취가 코를 연신 찔러댔다.

“빌어먹을.” 플린이 기침을 내뱉으며 작게 말했다. 그는 순찰대원들이 서로 상의를 나누는 틈을 타 쇼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가 곁에 오자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꼭 . . . 부패하는 것 같아요. 죽은 사람도 아닌데.”

쇼가 이를 악 물고는 장갑을 팽팽히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횃불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죠?” 플린이 말하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

“그래도 오늘 저녁이 조금 더 재밌어지긴 했네요.”

            “그렇긴 하죠.” 쇼가 맞장구쳤다.

두 사람은 그리핀을 같이 타고 까마귀 언덕으로 날아가는 길이었다. 플린은 양팔로 쇼의 허리를 휘감고, 턱은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가방은 덫, 독, 폭탄, 마름쇠 등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이윽고 플린은 새로 장만한 검이 매달려 있는 허리춤의 고정띠를 동여매었다. “얼른 특제 언데드 퇴치 커틀라스를 써보고 싶네요.”

“그런 이름이 아니잖-”

“이젠 맞죠. 너무 늦었어요.”

“술병을 물약으로 착각하지나 마십시오.” 쇼가 경고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오히려 좋은 선택이 될지도 모르죠. 아무렴 ‘술기운’이란 말이 괜히 있겠어요?”

쇼가 유난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필요 없을 겁니다.”

플린이 눈을 깜빡였다. 사람, 방금 . . . ?

하지만 바로 이어진 첩보단장의 말은 사무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견고한 보호를 받고 있긴 하지만 야생 언데드 수가 꽤 많을 겁니다. 칼은 고사하고 당신의 촌철살인 같은 말로도 막을 수 없는 녀석들이 태반이겠죠.”

몰래 술병으로 손을 뻗던 플린은 우연히 밑을 힐끗 보았다. 울창하게 우거진 그늘숲의 나무들이 길에서 벌어지는 일 상당수를 감추고 있었다. 전부 다 감춘 건 아니지만. 길은 움직이고 있었다.

둑이 터진 광경을 보는 듯했다. 은은한 달빛에 심기가 불편해진 시체들이 어둠골로 쇄도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불빛이 보이기는 했으나 어떤 위안도 되지 않았다. 진실로 저 홍수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로 이뤄진 것이라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전세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

굳이 길을 따라갈 필요가 있나요?” 플린이 나름 가벼운 어조로 쇼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문제지.

“약간 북쪽으로 가죠.” 쇼가 말했다. 그는 플린의 용기에 난 균열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고, 이에 해적은 안도했다. 그리핀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다른 곳보다 확연한 생기가 감도는 숲 위를 서서히 지나갔다. 이번에 밑을 힐끔 내려다보니 유령으로는 보이지 않는 은은한 푸른 빛이 플린의 시선에 들어왔다. 하얗게 포장된 도로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플린은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잦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저건 뭐죠?” 그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황혼의 숲입니다.” 쇼가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싸움터로 뛰어들기 전에 마음을 달래주는 풍경을 보면 그런대로 좋은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플린은 촘촘한 수풀 사이로 스며 나오는 아른한 푸른 빛을 눈에 담으며 그 감성을 체화했다. 언뜻 보기에는 평온의 웅덩이 자락에서 발산되는 것 같았다. “이런 광경을 예전에 본 적 있는데 . . . 달샘인가, 맞죠? 나이트 엘프들 것인가 그럴 텐데?”

“맞습니다. 나이트 엘프가 여신 엘룬에게 바친 곳이죠. 물에 치유 성분이 있는데, 무척이나 고요한 곳입니다.”

“고요함이라, 그거 좋네요. 이렇게 합시다. 다음 모험에서는 모험만 빼고 그냥 달샘으로 직행하죠.”

“제가 저번 소란이 있고 나서 어디 평화로운 곳으로 가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그렇죠. 근데 이번 소란은 전적으로 제 작품이라는 걸 잊으셨나 봅니다.”

쇼가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다음 모험에는 달샘으로 갑시다. 지금은 . . .” 쇼의 어조가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곧 까마귀 언덕에 도착할 겁니다.”

“걱정 말라고요, 친구” 그리핀이 하강하자 플린이 말했다. “전 완전히 준비됐거든요.”

파도시여, 구원하소서. 아직 준비가 됐단 말입니다.

쇼는 공동묘지 입구에서 이만큼 떨어져서 착지했으면 충분히 안전한 거리라 생각했다. 플린은 “안전한 거리”를 논하려면 쿨 티라스에 착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달리 말을 꺼내진 않았다. 곧이어 쇼는 그리핀을 풀어 어둠골로 돌려보냈고, 플린은 그런 녀석이 부러웠다.

야수의 등에 올라탄 채로 언데드를 내려다보는 것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밀집한 머릿수에 비교해 보면 길가의 언데드 무리는 단란한 소모임에 지나지 않는 정도였다.

“명심하십시오.” 쇼가 말했다. “놈들은 야생 언데드입니다. 지성이 아니라 본능을 따르는 놈들입니다.”

플린이 몸을 곧게 폈다. “우리 같은 도적 정도면 몰래 지나치는 건 일도 아니겠군요! 근데 . . . 어디로 숨어들면 되죠?”

“횃불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버려진 흉가로 갈 겁니다. 사건의 경위와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플린은 엄폐물을 신중히 선택해 시야에서 사라지는 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 몰래 빵을 빼돌리며 실력을 갈고닦은 플린 역시 그대로 따라 했다. 플린은 차근차근 첩보단장의 뒤를 따랐고, 둘 다 어찌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지 풀 한 포기조차 밟혀 꺾이는 일이 없었다. 밀착해서 본 야생 언데드는 플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흉측했다. 부패하는 내장, 피부 바깥으로 드러난 뼈 . . . 그릇된 광경을 보니 머릿속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고, 부패의 악취로 속이 메스꺼웠다. 하지만 그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아침에 먹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자제했다. 지금 쇼에게는 플린이 필요한 상황이니 그에 부응할 요량이었다.

“아수라장”. 흉가를 그나마 가장 좋게 표현한 수위가 이 정도였다. 리치가 한때 집으로 삼았던 장소는 그야말로 모든 게 주인을 빼닮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때 쇼가 일종의 의식 진으로 에워싸인 문 근처의 말뚝을 가리켰다. 보호의 마법진이 뚫려 있었다. 명백한 증거로-

“발자국이로군요.” 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냥 평범한 발자국은 아닙니다. 저기 메마른 풀이 보입니까?”

하나 플린은 발자국 따위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쇼에게도. 발밑의 지면을 부패하게 만드는 마귀를 이미 찾아낸 뒤였기 때문이다.

여인의 형상을 한 마귀는 인간이거나 . . . 한때는 그랬으리라. 그녀는 흙먼지에 피, 생각조차 하기 싫어지는 다른 것들로 얼룩진 회색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두건은 쓰지 않아 산발의 검은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났다. 낯선 여인의 얼굴은 핼쑥하고 핏기가 없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플린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보기 싫은 녹색 빛깔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 순간 플린은 여인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풀이 갈라져 갈색으로 변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 수수께끼 하나는 풀렸군.

두 유령이 여인 주위를 둥글게 맴돌면서 일종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들의 얼굴은 무자비한 파도에 삼켜지기 전, 수면 위로 떠 오른 부푼 익사체 같았다. 플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뒤이어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무언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 여인의 곁에 가지런하게 정렬했다. 나머지 망자들은 특별한 목적이나 생각 없이  계속 느릿느릿 방황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 중 굴욕스럽고 가슴이 미어지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마술사인지 강령술사인지 그 끔찍한 정체를 확언하기 어려운 여인이 하얀 불꽃을 에워싼 금속 광륜이 달린 가느다란 은제 유물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화 횃불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그의 어깨에 손의 촉감이 전해졌다.

플린은 당장에라도 펄쩍 뛰려고 했으나, 알고 보니 쇼의 손이었다. “우릴 감지하지는 못하나 봅니다.” 쇼가 속삭였다.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 . . 우리도 알았겠죠. 뒤를 밟아 횃불을 어떻게 하려는지 지켜보죠. 저기 자루를 천으로 감싼 게 보입니까? 직접 손댈 순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호재인 셈이죠.”

일행의 표적은 하얀 돌을 깎아 만든 거대한 구조물로 향했다. 그녀는 입구 앞에 잠시 멈춰서더니, 지하 무덤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어디로 가는지 한번 물어볼까요?”

쇼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플린에게 돌아서서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지하묘지로 내려간 겁니다.” 쇼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지하묘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서 그럴 겁니다. 시체가 많은 곳을 찾는 게 사리에 맞는 판단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플린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를 걷어 차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쇼를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용기까지 냈건만. 이제 와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이 양반 . . . 도움 안 될 소리만 하네.” 플린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말했다.

“페어윈드, 당신에게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쇼가 말했다. “이 빛조차 버린 장소의 모든 것에 직접 맞섰잖습니까. 그러고도 이렇게 살아 있죠. 놈들 수가 많은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횃불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뿐. 제가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그리고 . . . 당신도 절 지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플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쇼를 지켜줄 생각은 당연히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상대가 용이라고 한들 물러서지 않으리. 살아있지도 않은 것들 몇 마리쯤은 . . . 하여간 수가 많다고 한들 무슨 상관일까?

“물론이죠, 친구.” 플린이 강단 있게 말했다. “횃불은 이미 우리 차지나 마찬가지예요. 해골 녀석들을 혼쭐내 줍시다.”

그렇게 플린 페어윈드는 앞장서서 지하묘지에 발을 들였다.

일행은 언데드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최상층을 몰래 통과했다. 스무 마리는 넘는 같은데. 플린이 혼자 되뇌었다. 차라리 다행이지. 그리고 다음 층이 나왔다. 두 사람은 천천히 뱀처럼 굽이진 무덤의 퀴퀴한 심연으로 내려갔다. 가장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통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플린과 쇼는 화로의 불길조차 흔들리지 않을 만큼 신중하게 하강했다.

마술사는 하얀 가루로 그려진 의식 진 중심에서 등을 돌린 채 알 수 없지만 불안한 진언을 속삭이고 있었다. 뼛가루겠지. 플린이 생각했다. 오늘 운세를 생각해 보면 뼛가루가 확실할 거야.

성화 횃불이 그녀 앞에 둥둥 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린은 여인이 횃불에 자신의 의지를 주입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흉하게 생긴 검은 촉수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횃불의 은제 손잡이를 휘감았고, 불꽃은 미친 듯이 깜빡였다. 황금빛이 섞인 순백의 은은한 불길이 추악한 멍처럼 보랏빛을 띤 검은 불길로 변모했다. 플린은 방금 본 광경이 신성과 부정의 의지의 대결이란 걸 불현듯 깨달았다. 혼란스러운 그늘숲, 어쩌면 그 이상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란 점은 명백했다.

그 생각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주문을 외우던 마술사가 말을 멈췄다. 그녀가 서서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본디 입술이 있던 자리에 혐오스러운 미소가 떠 있었다.

“거기 있는 걸 모를 줄 아느냐.” 여인의 음산하고 공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쇼는 플린을 흘낏 보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숨어 있으란 의미였다. 그런 다음 벌떡 일어나 강령술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첩보단장은 독을 바른 단검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목적이 뭐지?” 쇼가 추궁했다. “그늘숲 주민들을 괴롭히려고 모벤트 펠을 되살린 건가?”

여인이 목이 쉰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 모벤트 펠이라! 사뭇 아련한 이름이로군. 틀렸다, 첩보단장이여. 그딴 쓰레기 같은 자는 내 안중에도 없다. 이 몸의 이상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느니라.”

플린은 조용히 배낭 측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의식 진이 뼛가루일 거란 본인의 짐작이 적중하길 빌었다. 그는 의식 진 주변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천천히 술병을 꺼냈다. 그런 다음 병 안의 아름다운 술에게 사죄를 속삭이며 용기를 기울였고, 이내 럼주가 흘러나와 바닥의 뼛가루를 지워내기 시작했다.

            이상? 쇼가 조소를 흘렸다. “위험한 건 물론이고  망상에 사로잡혀 있군.”

플린의 시선이 다시 횃불로 옮겨갔다. 강령술사 . . . 오염된 유물 . . .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았다.

강령술사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변화를 목도했다, 첩보단장이여. 부패 속에 이상이 있는 법. 분해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생사와 면밀한 이들은 우리의 골수를 통해 느낄 수 있노라. 이 세계의 영혼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그 도착을 예비할 것이야. 그늘숲보다 발전된 도시를 염두에 두고 있긴 하지만, 옛집 방문이야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니까.” 여인이 손짓하자 영혼들이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그 주변을 휘몰아쳤다. “가지고 놀 망자가 이렇게나 많다니. 스톰윈드로 갈 땐 국왕의 첩보단장을 데려가는 것도 괜찮겠구나.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적대하게 만들어 주마. 어차피 살육은 익숙하지 않더냐, 첩보단장 쇼.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을 거다.”

마지막 남은 뼛가루까지 없애자 진이 파괴되었다. 곧이어 플린은 전방으로 달려들어 강령술사의 목을 노린 혼신의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강령술사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는 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단검에 휘두르며 일련의 험한 말을 쏟아냈다. 후웅 하고 칼날이 자신을 비껴가는 소리가 플린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페어윈드, 횃불을 챙기십시오!” 쇼가 강령술사에게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는 그녀의 목에 줄을 휘감고는 목을 비틀어 버렸다. 강령술사는 손톱이 검게 물든 손을 재빠르게 내뻗어 줄을 뜯어내려고 몸부림쳤고, 말은커녕 헐떡이는 숨소리만을 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당할 각오를 다진 플린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강령술사의 몸체 너머로 손을 뻗어 허공에 떠 있는 유물을 낚아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격동이 아닌 편안한 안정감이 그를 포용했다. 가벼움. 희망. 하지만 강령술사가 더럽힌 흔적은 명징하게 남아 있었다. 성화 횃불은 아직 타락하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악에 맞서는 무기는 아니게 된 상태였다. 절망이 물밀듯이 몰아쳤다. 플린은 사제가 아니었고, 그건 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두 사내일 뿐이었다. 조금 더 안전하게 말이다. 플린은 강령술사의 어둠으로 오염되긴 했지만, 본래의 신성성을 되찾으려는 횃불의 분투가 느껴졌다.

그가 느낀 수많은 감각은 일순간에 찾아온 것이었고, 그 순간 어떤 발상이 떠올랐다. 내가 고쳐줄 없지만 . . . 대신 고쳐줄 있는 알지.

플린이 젖 먹던 힘을 끌어내 고함쳤다. “쇼! 다음 모험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무슨 해괴란 소리란 말인가. 잠시 정신이 팔린 쇼는 그만 강령술사가 속박을 풀게 하는 여지를 주고 말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후두음을 폭풍처럼 토해냈다.

쇼는 힘겨운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가슴팍을 부여잡았지만, 기어코 플린 곁에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두 사람은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 플린은 전방에서 무언가가 부산히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몇 번은 죽었어야 정상인 자들이 내는 소리였다. 강령술사가 더 명령을 내릴 만큼 회복된 건 자명해 보였다.

“모험이라고요? 허.” 가쁜 호흡으로 내달리던 쇼가 말했다. “달샘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것 같습니까?”

“상처 소독에 럼주만큼 특효약이 없단 말이죠. 그럼 마법 횃불은 정화하는 데 마법 같은 게 필요하지 않겠어요?”

“이런 미치광이 천재를 봤나.”

두려움에 떨 시간은 없었다. 오로지 본능만을 따를 뿐. 플린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는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커틀라스를 움켜쥔 채 맹렬하게 베고, 갈비뼈를 분쇄하고, 해골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살점과 이빨이 흘러내리는 시체가 달려들면 그대로 걷어차 쇼가 다루는 한 쌍의 단검의 제물로 만들었다. 다음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전 플린은 배낭을 쇼에게 던져주었다. 앞서 따돌렸던 모든 괴물이 두 사람을 벼르고 있었다.

“횃불!” 쇼는 이렇게 외친 뒤 고개를 돌려 침을 흘려대는 괴물 세 마리를 상대했다.

플린이 야생 언데드에게 횃불을 휘둘렀다. 옷조각에 불이 붙었고, 성스러운 빛에 망자는 몸을 비틀며 괴성을 내질렀다. 플린은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의식이 반쯤 끝나긴 했어도 횃불이 돌이킬 없는 강을 건넌 아니었다! 있는 힘을 다해 활로를 개척하며 빠져나온 두 사람은 악취가 진동하는 밤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공동묘지 관문으로 달렸다.

            플린의 뒤로 독폭탄이 작은 폭음을 일으키자 그는 활짝 웃었다. 쇼가 속임수, 간식, 덫으로 가득한 플린의 배낭을 활용하고 있었다. 마름쇠, 작은 방화 장치, 독이 든 병, 실명 가루 . . . 쇼는 거침없이 내용물을 어깨 너머로 던져댔고, 플린은 일부나마 소망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뒤따라온 쇼에게서 힘에 벅찬 숨소리가 들렸다. 그를 곁눈질로 본 플린은 그대로 공포에 질려 굳어버렸다.

            “쇼 . . . 당신 얼굴이-”

            달빛에 비친 첩보단장의 창백한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 . . 그리고 작고 흉한 고름집이 맺히고 있었다.

파도시여, . . . 제발! 사람만큼은 -

“그리핀!” 쇼가 희미하게 기척이 들리는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플린은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순찰대원들이 탈출하거나 야생 언데드의 물결에 합류하는 사이 그리핀 중 한 마리가 기를 쓰고 밧줄을 물어뜯고 있었다.

            “안녕, 귀염둥이.” 플린이 밧줄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잠깐이면 돼. 같이 빠져나가는 거야!”

            쇼가 힘겹게 안장에 기어올랐다. 플린이 밧줄을 끊어내자 정작 올라타기도 전에 그리핀이 매섭게 하늘로 치솟았다. 찰나의 순간이 악몽처럼 느껴졌다. 플린은 이대로 야수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쇼는 그렇게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첩보단장은 비록 병으로 쇠약해지긴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플린의 손목을 낚아채 그리핀 앞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순간 야수가 발톱을 펼쳐 그를 붙잡았고, 어느새 플린은 맨몸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언데드의 형상을 힐끗 내려다보곤 무례한 손동작을 내보였다. “ 좋다, 쓰레기 . . . ! 뒤를 봐요!”

강령술사가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강령술사가 올라탄 물체는 두 사람이 탈출해 온 거북한 공포보다 훨씬 섬뜩했다. 자신의 여주인과 같은 혐오스러운 오라를 발산하는 데다, 썩어가는 가죽과 바스러질 것만 같은 말 골격, 강령술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플린은 살아생전 날개 달린 말을 본 적이 없었다. 악몽마는 그야말로 추악하고 부정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은 역겨운 소산이었다. 더 최악인 점은 그런 흉물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핀은 날개를 더욱더 빨리 펄럭였다. 플린은 추적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핀이 날갯짓할 때마다 평안하고 아름다운 달샘이 가까워졌다. 저곳이 바로 플린의 기도에 대한 해답이었다.

착지하려는 순간 밝은 녹색이 작렬하며 그리핀의 날개를 찢어버렸다. 그리핀은 소용돌이치며 추락했고, 플린과 쇼는 떨어져 나갔다. 야수는 다리를 절며 다시 어둠골로 떠나갔다.

! 플린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첩보단장의 얼굴과 가슴팍에 생겨난 상처는 곱절로 늘어나 있었다. 플린은 손을 뻗어 그를 말렸지만, 쇼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밀쳐냈다.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당신은 횃불을 정화하십시오. 지금은 그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단검을 뽑아 들었다. 고개를 치켜든 쇼의 얼굴은 물집이 가득했지만 의연했다. 곧이어 강령술사가 추악한 공기를 내뿜는 헤진 날개를 타고 내려왔다.

플린은 생각했다. 이런 용기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쇼에게서 달샘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 온 의지를 쏟아부어야만 했다. 방법은 통할 거야. 통해야만 . 대안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플린은 곧바로 유혹하는 듯한 푸른빛의 물속에 뛰어들었다. 곧바로 떠올랐지만, 그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고, 숨을 갈구하듯 물장구를 치며 황급히 나아갔다. 끝내 한 손으로 횃불을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소중한 샘물을 담아 횃불 자루에 끼얹었다. 제발, 제발 . . .

            불꽃이 깜빡였다. 순간 순백색으로 타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검은 빛을 발산했다. 플린은 몇 번이고 반복해가면서 샘물을 흩뿌렸다. 부산한 와중에도 그의 이목은 횃불이 아닌 쇼와 괴물의 혈투에 쏠려 있었다.

앞서 지하묘지에서 쇼는 강령술사에게 타격을 줬다. 그녀의 목에 난 가느다란 틈새 사이로 새카맣고 끈끈한 체액이 스며 나오는 게 플린의 눈에는 보였다. 몸놀림도 확연히 느려졌는데, 그건 쇼도 마찬가지였다. 선혈로 물든 그의 방어구는 시체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너무나 선명한 붉은색이 군데군데 보였다. 강령술사는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으나 주문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쇼가 순간적으로 얼어붙더니 플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봤을 뿐이지만 그 눈빛은 한없이 암울했다. 플린은 쇼의 표정을 확실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다만 마술사의 말에 쇼가 큰 충격을 받았고, 이젠 무력함과 고통에 찌든 얼굴로 플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플린은 심장이 멎기 직전이었다. 강령술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떠들었기에 의연한 쇼가 저리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저리도 당혹한 표정을 짓다니?

여인은 쇼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못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유치해 보였다. “어둠의 날개가 네 소중한 것을 모두 앗아가리라.” 그녀가 쇼를 보고는 킬킬댔다. “이 얼마나 멋진 날이더냐? 그리고-”

고통에 찬 포효와 함께, 플린은 횃불을 달샘에 담갔다.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공포가 플린의 감정을 휩쓸었다. 그러더니 새로운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 심장을 어루만졌다. 기쁨. 용기. 신념. 이윽고 나이트 엘프 달샘에 잠긴 채로 있던 횃불이 활활 타오르며 순백색의 성화를 피워냈다.

플린은 샘에서 뛰쳐나가 강령술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강령술사의 망토에 성화를 붙인 플린은 그녀의 흉물스러운 얼굴을 살폈다. 강령술사는 절규를 내지르는 와중에도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비틀어 불꽃을 피했다. 그러나 불길은 가볍게 여인을 삼켜 몸, 머리카락, 옷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반질반질해진 그녀의 피부가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령술사의 절규는 젖은 기침으로 변화했고, 쇼의 독칼이 목을 관통하면서 끝내 침묵으로 변화했다. 마침내 본인이 부렸던 시체들처럼, 강령술사는 바닥에 쓰러져 최후를 맞이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플린의 눈길이 쇼에게로 향했다. 부상당한 것도 모자라, 피투성이에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무사했다. 플린은 터덜터덜 다가가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부둥켜안았다.

#

철저한 경계를 수행하는 원래 자리로 돌아간 횃불을 보는 플린의 입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성화 횃불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버려진 흉가를 수호하며 어둠의 기억을 몰아내고, 마음을 달래는 빛을 선사하리라.

쇼는 주변을 배회하던 순찰대원을 찾아 적어도 어둠의 사도 중 하나를 저지하였고, 성화 횃불은 수복 및 정화를 마쳤다는 좋은 소식을 어둠골에 전하도록 했다.

“페어윈드 선장?” 래디모어 사령관은 힘겹게 순찰대원 커트포드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쇼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던 초자연적인 질병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늘숲이 두 분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령관이 말했다. “오늘 밤 절 포함해 수많은 인명을 구하셨습니다. 횃불을 타락시키려는 강령술사를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 . . 옛날처럼 지역 전체가 언데드의 수중에 떨어졌겠죠.”

“순찰대원들이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쇼가 말했다. “순찰대의 노고 덕택에 어둠골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순찰대는 두 배로 늘리도록 하십시오. 스톰윈드 경비병을 추가로 파견하겠습니다. 강령술사는 이게 끝이 아니란 듯한 암시를 던지더군요.” 그가 고심에 잠긴 얼굴로 횃불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건 잘 지켜보십시오. 아주 잘 지켜봐야 합니다.”

“뭐 . . .” 플린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죽어라 고생했는데 씻고 오늘의 승리를 기념해야지 않겠어요?”

“먼저 가십시오.” 쇼가 말했다. “전 이곳 일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아.” 플린이 말했다. “그렇죠, 그렇겠죠. 아무튼, 어 . . . 우리 호흡이 제법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쇼가 말했다. 그는 잠깐 플린을 빤히 바라보더니, 무슨 결정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까딱였다. 쇼가 래디모어 사령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

여관으로 돌아온 플린은 목욕을 한 후 의기소침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도 쇼가 늦을 거란 건 웬만큼 예상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쇼는 이미 목욕을 마치고 불가 옆에 두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게 아닌가.

“아주 말끔하게 씻었네요.” 그가 쇼에게 말했다. 대단히 말끔하게 씻은 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어둠의 순찰대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플린이 자리에 앉자 쇼가 운을 뗐다. “보물 사냥을 마치지 못해서 당신 지도를 보여줬거든요. 그랬더니 이걸 찾아주지 뭡니까. 당신에겐 값진 물건일 겁니다.”

“오호!” 선물 자루를 풀어 헤친 플린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는 희한하리만치 광택이 빛나는 손거울을 들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밀착해서 쓰기 딱 좋겠어요.” 여러 의미를 담은 말장난은 플린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값진 물건이란 말도 맞는 소리예요. 잘생긴 사나이를 볼 수 있으니.”

쇼가 반응하지 않자 플린의 미소가 사라졌다. “왜 그래요?”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멀거니 불꽃을 바라보던 쇼가 입을 열었다. “사라 말이 맞습니다. 하마터면 오늘 밤이 재앙이 될 뻔했어요. 횃불은 강력한 유물이고, 유사한 물건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천만다행이죠. 국왕 폐하께서는 종종 그런 유물을 확인하도록 절 파견하시곤 합니다. 작금의 아제로스는 이 이상 조용할 수가 없을 지경이란 말이죠. 그런 유물들을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전부 분류하기에 지금처럼 완벽한 시기는 없을 겁니다.” 쇼가 녹색 눈을 치켜들어 플린과 맞추었다. 플린은 심장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될 겁니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테죠. 연락책, 그중에서도 깊이 잠복해 있는 이들에게 연락해 국무를 논할 겁니다. 비밀 은신처를 안내받을 것이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유물을 맡게 되겠죠. 동굴, 적, 유령, 묘실까지 온갖 것을 접하게 될 거예요. 언제나 생환하지 못할 가능성을 안고 가야 할 겁니다.”

작별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플린은 차마 쇼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칠 수 없었다. “이거 혹시 . . . 그러니까 . . . 제가 횃불을 정화할 동안 당신은 강령술사를 상대했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죠. 그걸 들은 당신은 경악한 얼굴로 절 쳐다봤고요. 마티아스, 그 여자가 어둠의 날개 어쩌고 얘기했던 건-”

쇼가 손을 뻗어 플린의 손을 굳세게 잡았다.

“전 봤습니다, 플린. 다 봤어요. 우리 배낭을 럼주로 채우는 대신 붕대, 덫, 무기를 채워 넣는 걸 봤습니다. 당신은 고통에 빠진 이와 함께할 만큼 상냥하고, 늦기 전에 수습할 수 있을 만큼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내는 눈썰미를 갖춘 사람입니다. 심지어 언데드를 혐오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에서 수십 명의 언데드와 맞서길 주저하지 않았죠. 위험한 존재와 싸우고, 물리칠 방법을 알아낸 것도 당신입니다 . . . 제가 구사일생한 것도 당신 덕분이고요.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플린. 동행을 제안하는 거죠.”

플린의 눈이 희망과 불신으로 차올라 휘둥그레졌다. “저랑요? 왜 하필이면 저를?”

쇼가 싱긋 웃었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진솔한 미소에 플린은 존재가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야 . . .” 쇼가 플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전 당신을 믿거든요.”

사람의 열망을 자극하는 문구는 셀 수 없이 많다. 사랑합니다. 럼주 맛이 좋군. 이런 멋진 친구를 봤나. 하지만 . . . 지금 이 순간, 플린은 마티아스 쇼의 “전 당신을 믿거든요”라는 말을 빌어먹을 세상에서 최고의 구절로 손꼽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잠시 멍하니 실실대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과도하게 태연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동행하자고 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쇼의 동공이 흔들렸다. “정말입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플린이 부드럽게 쇼의 손을 잡아끌었다. “뻔하잖아요?” 몸을 앞으로 내민 쇼가 말을 이었다. 쇼가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자 플린의 목소리는 한층 감미로워졌다. “순풍도 없이 . . . 어떻게 모험을 할 수 있겠어요?”

“꿈도 못 꾸죠.” 쇼의 속삭임과 함께 두 사람은 입맞춤을 나눴다.